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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연이 고마워서

    차향에 취하고
    문학에 물드는
    가을 여행

    경상남도 하동군

    차향에 취하고 문학에 물드는 가을 여행

    경상남도 하동군

    지리산 자락과 섬진강이 어우러진 경상남도 하동군은 천년 넘게 차 향기를 품어온 고장이다. 신라 시대부터 이어진 시배지의 역사를 간직한 이곳은, 매년 봄이면 온 고을이 초록빛 찻잎으로 물들며 한국 차 문화의 현주소이자 자연과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여행지로 자리하고 있다. 차는 우릴 때마다 조금씩 다른 맛을 내듯, 자연도 계절마다 새로운 깊이를 빚어낸다. 무르익어 가는 가을, 차 문화로 꽃피운 하동에서 느림의 미학과 야생 차나무, 그리고 거목 박경리의 문학 무대를 함께 감상해보자.

    천년의 차향이 깃든 곳

    하동군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방면으로 향하면, 야생 차나무들이 신비롭게 줄지어 앉은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고즈넉한 사찰과 닮은 연륜을 풍기는 이곳은 2008년 7월 공식 차 시배지로 등록된 '쌍계사 차나무 시배지'이다. 일반적인 차밭이 가지런히 늘어선 모습이라면, 시배지는 동글동글한 차나무들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법향다원'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신라 흥덕왕(828년) 때 당나라 사신으로 간 김대렴(金大廉)이 차 씨앗을 들여와 왕명으로 지리산 일대에 처음 심으면서 조성됐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화개장터 동서쪽 산기슭에서부터 쌍계사를 지나 범왕리에 이르는 화개천의 양쪽 기슭에는 야생상태로 된 차나무밭이 12km나 뻗어 있다.

    차 시배지 길 건너 바로 맞은편에는 시배지의 역사와 차문화를 집대성한 '하동 야생차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은은한 차향이 퍼지고, 한쪽에는 그윽한 다기가 전시돼 있다. 차가 어떻게 이 땅에 전해졌는지, 하동의 기후와 산세가 왜 차 재배에 적합한지, 그리고 찻잎이 한 잔의 차로 태어나기까지의 과정이 차근차근 펼쳐진다. 직접 찻잎을 따고 덖으며 차를 만들 수도 있고, 전통 다례를 배우는 다도체험 또한 가능하다.

    박물관 뒤편에는 실제로 찻잎이 자라는 야생차밭이 있어 초록의 산책길을 걸으며 차향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차 시배지와 야생차박물관을 찬찬히 둘러보고 나면, 천년의 세월을 이어온 한국차문화의 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초록 물결을 눈에 담으며

    초록 물결을 눈에 담으며 여행자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도심 다원 카페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산 위 전망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카페는 오두막 쉼터와 삼각 캐빈 등 아늑한 공간으로 구성돼 있어, 일상의 피로를 풀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에 제격이다. 차 바구니 세트를 예약하면 하동산차와 디저트를 함께 즐기며 한층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도심다원에서 차량으로 약 5분 이동하면 안개가 자욱하고 다습한 '정금차밭'의 넓은 품으로 들어서게 된다. 정금차밭은 봄이면 작은 야생화가 차밭 사이사이 피어 조화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차밭 맨 꼭대기에는 '단금정'이라는 정자가 마련돼 있는데, 이곳은 차밭을 배경으로 인생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진 촬영 명소로 유명하며 녹차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하동 여행의 몰입도를 더욱 높이고 싶다면, '천년차밭길' 트레킹 코스를 추천한다. 천년차밭길은 차 시배지에서부터 정금차밭까지 이어지는 약 2.7km의 산책코스로, 데크길과 마을 오솔길이 교차해 수월한 트레킹이 가능하다. 소요시간은 약 50분이며, 한적한 자연을 감상하며 감성과 휴식에 동시에 취해도 좋다.

    문학이 꽃핀 들판

    하동을 찾는다면 차밭과 함께 꼭 들러야 할 또 다른 명소가 있다. 단금정에서 약 13km, 섬진강을 따라 내려가면 푸른 들판 위에 부부처럼 나란히 선 두 그루의 소나무가 마치 오래된 풍속화처럼 여행자를 맞이한다. 이곳이 바로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 '평사리 최참판댁'이다.

    조문환 시인은 <하동학개론>에서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캔버스의 그림이 되는 곳"이라 표현했다. 그의 말처럼 평사리는 초가와 기와집이 한폭의 풍경화처럼 어우러진 마을이다. 실제 인물이 살던 집은 아니지만, 소설 속 주인공이 살던 저택을 충실히 재현해 놓았다. 사랑채의 대청마루에 올라앉으면 평사리의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흙담과 돌담이 이어지는 전통 한옥의 정취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가을에 열리는 '토지문학제'에 맞춰 방문한다면 문학과 가을의 낭만을 함께 즐길 수 있다.

    바로 근처에는 소설 <토지>를 집필한 박경리의 생애를 보존하는 '박경리문학관'이 있다. 1969년 43세 나이로 대표작 <토지>의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 그녀는 암 투병과 사위 김지하 시인의 투옥 등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겪으며 3만여 장의 원고를 써 내려갔다. 그녀가 세상에 내놓은 수많은 글과 <토지>의 초고 앞에 서면, 작가의 눈으로 평사리를 바라볼 수 있다. 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의 배경과 겹쳐지며 이내 자연이 곧 문학의 무대였음을 깨닫는다.

    박경리문학관에는 그녀가 생전에 사용했던 유품 41점을 비롯해 평사리 배경 사진 등 관련 자료가 함께 전시돼 있다. 척박한 땅을 일구던 손으로 문학의 뿌리를 키워낸 작가의 굳건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차와 문학의 향기가 짙게 깃든 하동을 감상하며, 여행자는 어느새 자연과 하나가 된다. 쌍계사 시배지에서 다원, 그리고 평사리에 이르는 길은 차와 문학, 그리고 자연이 만든 또 다른 작품이다. 하동의 자연은 오늘도 여행자의 마음에 차향처럼 스며들며, 다시 찾고 싶은 여운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