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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고마워서
오대산
선재길겨울 숲이
선물하는
사유의 시간
오대산 선재길
겨울 숲이 선물하는 사유의 시간
겨울은 신비로운 계절이다. 깊은 밤, 소복이 쌓인 눈과 깊은 밤의 고요는 마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하다. 거리에 나서면 입김 너머 아른거리는 불빛들 속에 축복을 기원하는 멜로디가 희미하게 들려와 차분하고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한다. 그래서일까. 이 계절에는 화려하고 북적이는 곳보다는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아늑한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이를테면 눈 덮인 숲속 산책길 같은 장소 말이다.
천년의 숲이 품은 겨울 비경
강원도 산간 지방에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짐을 챙겨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월정사.
궂은 날씨에 시외버스는 평소보다 30여 분이나 더 걸려 진부공용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월정사로 가려면 하루에 여덟 번만 다니는 시내버스를 타야 하기에, 몇십 분의 대기는 각오해야 한다. 휑한 거리, 새하얀 주변 풍경은 기다림을 더 춥게 만든다. 드디어 저만치 226번 버스가 보이자 세상 모든 문제가 해결된 듯 마음이 놓인다.
창밖의 낯선 풍경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월정사 정류장. 바로 그 지점부터 고대하던 월정사 전나무숲길의 설경이 시작됐다. 우리에게 익숙한 월정사 전나무숲길은 월정사에서 동피골을 지나 상원사까지 이어지는 오대산 선재길의 일부 구간이다. 오래전부터 스님과 신도들이 두 절을 오가던 선재길은 그 수려한 풍경이 외부에 알려지며 지금의 유명 관광지가 됐다.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약 10km에 이르는 선재길 중 월정사 전나무숲길은 '월정대가람'이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에서 시작한다.
울창한 전나무숲 사이로 난 흙길은 반질반질 잘 다져있다. 반영된 지 10년 가까이 흘렀지만 아직도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드라마 "도깨비"의 명장면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남녀 주인공이 앞뒤로 걸었던 해탈교 부근은 그 풍경만으로도 감성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흔히 촬영지로 유명한 장소를 방문하며 기대에 못 미쳐 실망하기 마련이지만, '천년의 숲'으로 불리는 월정사 전나무숲길은 예외다. 하늘을 찌를 듯 내 키의 10배는 족히 되는 전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길.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고목들의 울창함에 압도된 채 걸음을 내딛는다.
나무들은 가지마다 묵직한 눈덩이들을 얹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듬직하다.
나무들은 가지마다 묵직한 눈덩이들을 얹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듬직하다. 가끔 바람이 일면 눈가루가 날려 길은 은빛이 되고, 행인의 마음은 눈부시게 황홀하다. 성황각을 지나자 수명을 다한 전나무 한 그루가 눈을 소복이 얹은 채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할아버지 나무'라 불리는 이 나무는 무려 600년의 세월을 살다 2006년 비바람에 쓰러졌다고 한다.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생의 뒤안길마저도 당당한 모습이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산사에서 감상하는 오대산 절경
금강교에 다다르니 월정사 전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또 다른 설경이 펼쳐져 있었다. 널찍한 경내 한가운데 서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다. 마치 오대산 봉우리들이 호위하듯, 절을 감싸고 있는 장엄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비로봉, 동대산, 두로봉, 상왕봉, 호령봉 다섯 봉우리가 월정사를 중심으로 다섯 개의 꽃잎을 펼친 듯 순서대로 나타난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진신사리를 모신 팔각구층석탑이 고려의 정취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15m가 넘는 높이에도 불구하고 그 균형 잡힌 모습 덕분에 단아함과 겸손함이 느껴진다. 각 층 모서리에 달린 80개의 풍경은 바람이 일 때마다 맑고 아름다운 화음을 들려준다.
석탑 옆에는 팔각구층석탑을 향해 다소곳이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석조보살상이 있다. 이 보살상은 입가에 맴도는 부드러운 미소로 유명하다. 사람의 손으로 돌을 조각해 성스러운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했던 조상의 미의식이 엿보인다.
매서운 추위도 너끈히 견디게 할 만큼 멋진 풍경. 그리 길지 않은 거리지만 천천히 걸으며 오랜 시간 감상하다 몸을 녹일 장소를 찾았다. 전부터 있던 전통 찻집 '청류다원'과 그 옆에 새로 문을 연 카페 '난다나'. 두 곳 중 잠시 고민하다 '난다나'에 들어섰다. 산스크리트어로 '환희의 동산'을 뜻하는 난다나는 월정사 천왕문 곁에 자리한 카페로, 그 이름과 퍽 잘 어울린다. 온실처럼 사방이 유리로 된 건물 덕분에, 산사의 정취를 한껏 만끽할 수 있다. 자리에 앉아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삼키자, 추위로 움츠렸던 몸 구석구석에 온기가 스며든다. 이대로 완벽히 행복한 시간이다.
오감으로 느끼는 겨울
원래 계획은 월정사까지였지만 욕심이 생겨 동피골까지 가보기로 했다. 카페에서 몸을 녹인 덕에 조금 더 깊은 곳까지 가볼 용기가 생긴 것이다.
월정사의 가장 안쪽에 있는 후문을 나선 뒤 선재길 표지판을 따라 걸었다. 월정사 일주문에서 후문까지의 구간만큼 평탄하지는 않지만 걷기에 무리가 없는 완만한 경사로다.
부도밭과 섶다리, 오대산장을 지나 다다른 동피골. 월정계곡 위에 놓인 선재교가 보인다.
바로 옆에 물이 흐르는데도 눈이 녹지 않고 쌓여 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순백의 풍경과 청아한 물소리에 마음이 정화된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묵직한 겨울의 공기가 폐부까지 들어온다.
온전한 자연의 향기, 자연의 기운을 느끼는 순간이다. 산자락의 시린 겨울밤이 찾아오기 전에 발길을 돌릴 시간이다. 쉽고 편한 여정은 아니었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을 만날 수 있어서 고맙고 행복한 겨울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