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맛의 추억은 철을 타고

    끈끈하게 착 붙는
    행운의 맛

    끈끈하게 착 붙는 행운의 맛

    이맘때면 제과점이나 슈퍼마켓, 편의점, 대형마트 입구를 채우는 먹거리가 있다. 은근한 윤기가 흐르면서도 포슬포슬한 사탕덩어리. 과거시험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험생 선물로 사랑받아온 전통 간식 '엿’이다. 달콤한 위로이자 끈끈한 인연, 합격과 성공을 기원하는 상징으로 우리 곁에 머물러 온 엿의 이야기를 풀어본다.

    과학적으로 내는 천연의 단맛

    엿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문신 이규보의 <동국여지승람>에 엿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며, <영조실록>에는 '이번 과거시험장은 엄숙하지 못해 떡과 엿, 담배를 거리낌 없이 팔았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 <씨름> 속 구경꾼들 앞을 어슬렁거리는 엿장수의 모습 역시 엿과 우리 민족의 오랜 인연을 보여준다.

    엿은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보리를 물에 불려 싹을 틔운 뒤 말려 가루로 빻으면 엿기름이 된다. 이 엿기름을 따뜻한 물에 우려내면 효소가 전분을 당으로 분해해 은근한 단맛이 우러난다. 여기에 찐쌀이나 찰보리를 넣고 고루 섞은 뒤, 하룻밤 정도 삭히면 걸쭉한 단물만 남는다. 이 단물을 솥에 붓고 몇 시간 동안 졸이면 점점 끈적해지고 색이 진해진다. 불의 세기와 가열 시간에 따라 꿀처럼 흐르는 조청이 되거나, 수분기 없이 단단한 엿이 된다.

    삭힌 보리에서 단맛을 얻는 전통 제법은 과학과 지혜의 산물이다. 곡물의 전분이 엿기름 속 효소에 의해 당으로 분해되면서 생기는 천연의 단맛, 바로 자연이 빚은 달콤함이다.

    엿 제조 과정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장인의 기술이다. 불세기와 온도 조절로 점도를 만들어 내는 기술은 세대를 거쳐 전수되는 손끝의 기술이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설탕의 도입으로 엿 제조법이 달라졌다. 전분 대신 설탕을 녹여 굳히는 방식이 퍼지며, 엿은 사탕과 경계를 넘나드는 대중 간식으로 변모했다. 장날마다 엿장수의 힘찬 외침이 울려 퍼졌고, 아이들은 엿판 앞에서 군침을 삼켰다. 그 시절 엿은 서민들에게 달콤하고 흥겨운 위로였다.

    장터의 음악, 철의 리듬

    "엿이요, 엿! 달콤한 엿 나왔어요!"

    장터의 풍경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들려오는 소리가 바로 목청 좋은 엿장수의 외침이다.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볼 수 있었던 '엿 타기' 시연은 작은 공연이었다. 커다란 엿 덩어리를 번쩍 들어 올려 공중에서 길게 늘렸다 접는 과정은 마치 마술 같았다. 엿장수는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 길거리의 예능인이었다.

    엿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도구가 있다. 바로 '엿가위'다. 엿장수는 긴 밧줄 모양으로 엿을 말아 가위와 정으로 한입 크기의 조각을 낸다. 엿장수에게 엿가위는 절삭 도구이자 악기였다. 능숙한 엿장수는 엿가위의 둔탁한 날과 헐렁한 조임쇠를 이용해 '짤깍짤깍' 흥겨운 리듬을 만들어냈다. 그 금속의 진동은 장터의 배경음악이자,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신호였다.

    한편, 조선시대의 엿가위는 대장장이 손끝에서 만들어졌다. 단단한 엿을 자르려면 강한 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불과 쇠, 그리고 장인의 손끝이 빚은 엿가위는 전통 기술의 상징이었다. 오늘날에도 대장간에서 수공으로 제작되는 엿가위는 여전히 '짤깍짤깍'하는 특유의 소리를 만들어 내며 전통의 맥을 잇는다.

    엿의 진화, 힙한 전통 간식으로

    최근에는 전통시장뿐 아니라 백화점과 온라인몰에서 수제 엿, 견과 엿이 인기를 얻고 있다. 설탕 대신 쌀조청이나 꿀을 사용해 건강식으로 재조명받는가 하면 '무설탕 엿', '비건 엿', '저당 엿' 등 프리미엄 라인도 등장해 젊은 세대의 호응을 얻고 있다.

    지역마다 특색 있는 엿도 눈길을 끈다. 인삼엿, 흑미엿, 오미자엿, 보리엿 등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제품이 관광 상품으로 발전했고, 전통 장인들은 현대적 포장 디자인과 브랜드 스토리텔링을 더해 '전통 간식의 리브랜딩'을 시도하고 있다. 엿은 이제 지역 문화를 전하는 콘텐츠로 확장하고 있다.

    현대 디저트와의 협업을 통해, 엿은 또 한번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엿 라테, 엿맛 젤리, 엿초콜릿 등은 엿의 힙한 진화를 보여준다.

    요즘은 엿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체험이 되는 시대다. 전국 각지의 엿공방에서는 방문객이 직접 엿기름을 우려내고, 반죽을 늘리고, 엿가위로 자르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렇듯 엿은 '구경하는 전통'에서 '향유하는 전통'으로 변화하며 맥을 이어가고 있다.

    어린 시절 시장에서 부모님을 졸라 엿을 사 먹던 세대에게 엿은 '추억의 단맛'이고, 새롭게 접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느리게 즐기는 단맛'이다. 빠르고 자극적인 세상 속에서 천천히 녹아드는 엿의 달콤함은 또 하나의 '느림의 미학'이다.

    입에 붙는 맛, 마음을 담은 맛

    엿은 '합격의 상징'이다. 끈적한 엿처럼 잘 붙으라는 의미를 담아 수험생에게 엿을 선물하는 풍습은 조선시대 과거시험부터 내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에도 수능철이 되면 제과점이나 슈퍼마켓, 편의점, 대형마트마다 '합격 엿'이 등장한다. '딱붙어엿', '힘내엿', '합격이당 엿' 같은 문구는 장난스러우면서도 진심이 담긴 한국식 격려다.

    엿은 또한 '끈끈한 관계'의 상징이기도 하다. 혼례나 돌잔치, 명절에 엿을 나누던 풍습은 길상(吉祥)의 의미와 함께 가족과 이웃 간의 유대감을 돈독히 하려는 뜻을 담고 있다. 특히 혼례를 앞둔 신랑이 신부집에 엿을 보내는 '엿보내기' 풍습은 좋은 인연을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엿은 곧 '함께 붙어 사는' 삶의 은유였다.

    손끝의 온기, 철의 강도, 그리고 마음의 온도가 어우러져야 완성되는 맛, 엿은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을 달래고, 누군가의 인연을 이어준다. 달콤쌉싸름한 인생의 맛처럼, 엿은 그렇게 끈끈하게 우리 곁에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