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이 고마워서

    겨울에 피어나는
    덕유산이라는
    눈꽃 세상

    겨울에 피어나는, 덕유산이라는 눈꽃 세상

    겨울의 문턱을 지나면 산은 흰 눈에 덮인 채 조용히 숨을 고른다. 얼마 전까지 단풍객으로 북적이던 덕유산도 이제는 적막할 만큼 사람의 발길이 드물다.

    눈꽃이 만개한 향적봉, 얼음 아래 숨 쉬는 구천동계곡. 이 겨울 덕유산 능선을 따라 걸으며 우리는 자연이 들려주는 가장 순수한 언어, ‘고요함’을 배운다.

    설국(雪國)으로의 초대

    경남 함양군과 거창군, 전북 무주군과 장수군에 걸쳐 있는 덕유산은 남쪽의 부드러움과 북쪽의 웅장함을 함께 품은 산이다. 사계절이 모두 아름답지만, 겨울 풍경이 유독 매력적이다.

    구천동탐방지원센터를 들머리로 덕유산 산행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향적봉까지 이어지는 탐방로는 편도 8.5km 거리로, 약 3시간 남짓 산행을 해야 한다. 단단히 결심을 하고 들어선 탐방로는 다행히 경사가 완만하고 곳곳에 쉼터가 있어 큰 무리 없이 오를 수 있었다.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걸음을 옮기다 보니, 숨이 가빠질 무렵 눈부신 세상이 펼쳐졌다. 겨울 나무들이 눈꽃터널을 이룬 좁다란 계단길. 또 다른 차원으로 이어질 것만 같은 아득한 풍경 속에 숨소리만 귓전을 울린다. 시야를 가득 채운 새하얀 눈과 짙푸른 하늘, 그 선명한 대비는 어떤 화려한 색의 조합보다 찬란하고 고결하다.

    옛 사람들이 왜 덕유산의 겨울 풍경에 찬사를 보냈는지 실감하며, 곱게 반짝이는 능선을 걸었다. 눈의 궁전에 놓인 계단을 오르는 듯한 꿈결 같은 시간이다.

    그렇게 한참 호사로운 산행을 이어가자 세월이 느껴지는 고풍스런 일주문이 나타났다. 신라 신문왕 때 백련이 암자를 짓고 수도하던 중 흰 연꽃이 솟아 창건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백련사다. 산그림자가 드리운 경내를 거닐며 절을 감싸듯 둘러선 봉우리들을 바라본다. 속세의 먼지가 걷히고 마음이 정화되는 듯하다.

    정상에서 느끼는 감동과 위로

    백련사에서 향적봉까지는 약 2.5km. 비교적 짧은 코스지만 경사가 급해 눈길에서는 더더욱 주의를 기울이며 천천히 올라야 한다.

    그래도 고지가 머지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발밑에서 눈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소복이 눈을 덮은 바위들을 지나 나무들이 키를 낮추기 시작하자, 하늘이 열리며 정상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향적봉 정상석 앞에 서자, 사방으로 펼쳐진 산맥이 한눈에 들어왔다. 동쪽으로는 지리산, 서쪽으로는 소백산까지 시야가 닿는다. 눈 덮인 산맥들이 파도처럼 이어지고, 하늘과 산의 경계가 흐려진다.

    향적봉대피소 앞에는 ‘당신의 마음에도 눈이 내리길’이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그 문장처럼 마음 한켠이 포근해진다. 나 자신도 몰랐던 깊은 곳의 상처가 천천히 아물어 가는 기분이다.

    얼음 밑을 흐르는 자연의 선율

    산 아래로 내려오면 또 다른 겨울의 얼굴이 기다린다. 덕유산의 대표 계곡, 구천동계곡이다. 이름처럼 아홉 번의 굽이마다 이야기가 흐른다.

    계곡 초입에는 ‘구천동 33경’ 중 일부가 이어진다. 수심대, 일사대, 수심교를 지나며 눈 덮인 바위 사이로 잔잔한 물소리가 들려온다.

    겨울의 계곡은 얼어붙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생명의 숨결이 흐른다. 얼음 틈새로 졸졸 흐르는 물줄기가 고요한 산중에 선율을 더한다.

    계곡을 따라 걷다 보면 길가의 억새에는 얼음송이가 매달려 반짝이고, 그 사이로 한 마리 새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른다.

    나무 사이로 김이 오르는 산장 카페에 들러, 따뜻한 유자차 한 잔과 갓 구운 군밤 한 봉지로 추위를 녹인다. 이런 고요한 시간이 나에게 얼마나 필요했는지 비로소 깨닫는다.

    고요한 자연의 위로

    해질 무렵 덕유산 어귀에서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무주리조트 스키장의 불빛이 설원 위에 반짝이고, 스키어들은 경쾌한 음악 속에서 짜릿한 질주를 즐긴다. 이곳은 초보자용부터 중급자용까지 다양한 슬로프가 있어 가족 단위 여행객이 많이 찾는다.

    꼭 스키를 타지 않더라도 설천봉 곤돌라 전망대에서 일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붉은 노을과 하얀 설원이 맞닿은 풍경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따뜻한 캔커피를 손에 쥐고 풍경을 감상하는 동안 얼어있던 몸에 온기가 번진다. 멀고 험한 여정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 그리고 덕유산 설경의 여운이 함께 스며든다.

    겨울산은 차갑지만 동시에 아늑하고 따뜻한 품을 지닌다. 세상의 소음이 멎고 바람소리, 흩날리는 눈 소리, 그리고 숨소리만 들리는 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걸을 힘을 얻는다. 말없이 전하는 자연의 위로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