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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의 추억은 철을 타고
세계를 사로잡은
한국의 매운 맛,라면
세계를 사로잡은 한국의 매운 맛, 라면
라면은 오늘날 한국인의 '소울푸드'를 대표한다. 값싸고 조리법은 간단하면서도, 특유의 깊은 맛으로 식사와 간식을 넘나드는 만능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인의 라면 사랑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세계라면협회(WINA, World Instant Noodles Association)에 따르면, 한국은 2024년 기준 총 40억 9,800만 개를 소비해 세계 전체 소비량 8위, 그리고 1인당 연간 소비량 79개로 2위에 올랐다. 이처럼 한국은 라면 강국으로서 아시아와 유럽, 북미 등 전 세계 시장을 이끌어 가고 있다.
고춧가루 한 스푼이 만든 히트상품
라면이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부터 지금처럼 '국민간식'이었던 것은 아니다. 1963년, 삼양식품이 일본의 라면 제조 기술을 들여와 내놓은 '즉석 삼양라면'이 한국 라면의 시작이었다. 당시만 해도 라면은 서민들에게 생소한 식품이었고, 맑은 닭고기 국물의 일본식 맛은 한국인의 입맛을 완전히 사로잡지 못했다.
전환점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시식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 사람들은 매운맛을 좋아하니 고춧가루를 넣어보라"는 의견을 제시했고, 삼양식품은 이를 수용해 국물을 닭고기에서 소고기 육수로 바꾸고 고춧가루를 더해 붉은 국물을 완성했다. 이때부터 한국형 라면의 정체성이 자리 잡았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한 '빨간 라면'은 곧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출시 당시 삼양라면의 가격은 10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저렴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손님이 와야 내놓을 정도의 귀한 음식이었다. 추억의 만화 <검정 고무신>에서도 라면이 서민들에게 '특별한 날 먹는 고급 음식'으로 묘사될 정도였으니, 지금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1970~80년대를 거치며 경제가 발전하고 생산량이 폭증하자, 라면은 불과 20년도 되지 않아 부잣집의 특식에서 서민의 대표 음식으로 위상이 바뀌었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는 주식의 자리를 차지할 만큼 든든한 존재가 됐고, 값싸고 만들기 쉬운 데다 맛도 좋아 자연스레 자취생들의 생존 음식이 됐다. "라면이 없었더라면 백만 자취생은 굶어 죽었을 것"이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라면과 냄비
한국 사람들에게는 "라면=양은 냄비"라는 공식이 자연스럽다. 노란 냄비 뚜껑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그 위에 갓끓인 라면 면발을 건져 올려 후루룩짭짭 먹는 장면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인의 공통된 기억이다.
그렇다면 이 라면을 맛있게 끓여 내는 냄비의 재료는 무엇일까? 오늘날 사용되는 조리용 금속 제품의 재질은 크게 주철, 스테인리스 스틸, 알루미늄 합금으로 나눌 수 있다. 주철 냄비는 무겁지만, 한번 달궈지면 열을 오래 품어 음식 맛을 깊고 진하게 만든다. 망치로 두들겨도 쉽게 손상되지 않을 만큼 튼튼하며, 쓰면 쓸수록 표면이 매끈해지고 기름이 배어 들어 잘 눌어붙지 않으며 세척도 쉬워진다. 말 그대로 반영구적인 조리도구다.
스테인리스 스틸 냄비는 내구성이 좋고 위생적이라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알루미늄 합금 냄비, 그중에서도 한국인의 라면 문화에 깊이 스며든 것이 바로 양은 냄비다. 얇고 가벼워 금세 뜨거워지는 특성 덕분에 라면을 빠르게 끓여내는 데 안성맞춤이다. 열이 빨리 식어버린다는 단점조차, '뜨거울 때 얼른 먹는 라면' 문화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글로벌 푸드로 자리 잡은 한국 라면
라면은 국경을 넘어섰다. 현대에 들어 한국 라면은 K-팝, 드라마, 영화 등 한류 열풍과 함께 전 세계로 퍼지며 글로벌 푸드로 자리 잡았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 <별에서 온 그대>, 영화 <내부자들>, <기생충> 속 주인공들이 라면을 끓여 먹는 장면은 해외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 결과, '양은냄비 라면', '짜파구리' 같은 한국식 라면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며 한국 라면은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2012년 삼양식품에서 출시한 불닭볶음면은 K-라면 열풍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영국 유튜버 조쉬가 불닭볶음면을 먹는 영상을 올린 것을 시작으로, '불닭볶음면 챌린지'가 SNS를 통해 급속히 확산됐다. 이후 '파이어 누들챌린지(Fire Noodle Challenge)'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플레이 불닭(Play Buldak)' 같은 글로벌 놀이 문화로 이어졌다.
또 올해 흥행 돌풍을 일으킨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헌터스(케데헌)'와 협업한 '헌트릭스 라면'도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해외 커뮤니티나 SNS에서는 아이돌굿즈급 인기라는 평이 나올 만큼 화제가 됐다.
트렌드를 끓이다
한국의 편의점에서는 매주 수십 종의 신제품이 등장하고, MZ세대는 그중 새로운 라면을 찾아내 인증샷을 올린다. 라면에 치즈, 버터, 트러플 오일을 넣어 고급 요리로 재탄생시키는 레시피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라면은 단순한 한 끼를 넘어, 나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무대가 되고 있다.
사람들은 '한정판'에 특히나 열광한다. 대전 '꿈돌이 라면'은 출시 2주만에 30만 개가 완판됐다. '대전에서만 살 수 있다'는 한정판 전략과 지역 캐릭터의 희소성이 맞물리며 소비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대전 곳곳의 '꿈돌이네 라면가게' 팝업스토어와 한정판 굿즈(키링, 냄비받침, 양은냄비)는 MZ세대를 중심으로 SNS 인증샷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라면도 깐깐하게 먹는 시대다. 요즘의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저탄수화물, 비튀김, 클린 라벨을 내세운 라면도 주목받고 있다. 건강을 챙기면서도 라면을 즐기고 싶다는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글루텐 프리나 고단백 등 프리미엄 라인이 생겨났다. '더미식 장인라면', '삼계탕면' 같은 차별화된 제품이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맛의 다양화, 커스터마이징, 한정판, 그리고 프리미엄 제품까지. 라면의 현주소는 그 어느 때보다 다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