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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고마워서
자연, 그 불규칙함 속의
아름다움제주 곶자왈
자연, 그 불규칙함 속의 아름다움
제주 곶자왈
살다 보면 ,한때의 불운이 실은 행운이었고, 장애물은 결국 바른 길로 가는 길잡이였음을 깨닫곤 한다.
농사짓기 어려운 땅이라 개발로부터 소외됐던 '곶자왈' 의 과거 또한,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참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버려졌기에 지켜질 수 있었던 생명의 숲, 곶자왈을 만나러 제주로 향했다
제주만의 숲
여러 번 발걸음해도 갈 때마다 낯설 만큼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게 되는 제주. 그건 아마도, 육지와는 사뭇 다른 아름다움이 제주의 자연과 문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를 특별하게 만드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화산섬이라는 점이다. 다섯 차례에 걸친 한라산의 화산 분출은 제주의 독특한 지형과 지질을 빚어냈고, 그 속에서 한라구절초, 제주달구지풀처럼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자생식물들이 자라게 됐다.
'곶자왈'은 제주어로 암괴들이 불규칙하게 널려 있는 지대에 형성된 숲을 뜻한다. 화산활동 중 분출된 용암이 만들어낸 이 암괴지대에는 나무와 덩굴식물이 우거지고, 곳곳에 습지가 형성됐다. 용암지대는 토양이 발달하기 어렵고, 표층부터 심층까지 암석이 깔려 있어 지금처럼 숲이 자라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에도 곶자왈이 수많은 동식물의 보금자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의 발길이 쉽게 닿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곶자왈은 제주의 동서 방향을 따라 분포돼 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보전 상태가 양호한 네 곳-서부의 한경-안덕 곶자왈, 애월 곶자왈, 동부의 조천-함덕 곶자왈, 구좌-성산 곶자왈을 제주의 4대 곶자왈이라 부른다.
자연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탐방
이번 여행에서 찾은 곳은 한경-안덕 곶자왈에 속한 제주곶자왈도립공원. 곶자왈의 생태를 보호하면서도 사람들에게 휴양, 체험, 학습 공간을 제공하는 생태관광지다. 신평에서부터 보성리까지 이어지는 일대 154만m2의 광활한 공원 안에는 총 6.5km 길이의 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탐방로는 테우리길, 가시낭길, 한수기길, 오찬이길, 빌레길 등 5가지 코스로 나뉘며, 코스별 예상 소요 시간이 안내돼 있어 자신에게 맞는 길을 선택하면 된다.
탐방안내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하고 가볍게 몸을 푼 뒤 트레킹을 시작했다. 구두나 샌들 처럼 앞이 트인 신발, 키높이 운동화는 탐방이 금지되며, 벌레와 기온차를 고려해 여름에도 긴팔 옷차림이 권장된다. 탐방로에 들어서자 울창한 상록활엽수들이 팔을 스칠 듯 가까이 다가온다. 종종 데크길 한가운데 뚫어 놓은 구멍 사이로 자라는 나무도 눈에 띈다. 길 너비가 좁은 것도 숲의 원형을 보전하기 위한 배려다. 나무의 성장을 최대한 방해하지 않도록 조성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곶자왈은 다양한 식물상을 이루고 있는데, 한정된 영역의 토지에서 많은 지형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지질과 지형의 특성 덕분에 주변 지역에 비해 겨울철에는 따뜻하고 여름철에는 시원한 기후를 띠는데, 이는 남방계와 북방계 식물이 공생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다.
공원 내에는 10m 안팎의 종가시나무가 높은 밀도로 서식하며, 녹나무 등 상록수가 사계절 내내 울창하게 뻗어 있어 늘 푸름을 간직한다. 특히 제주에 분포한 개가시나무 대부분이 이곳 곶자왈에 모여 있다. 이 숲에는 멸종위기 야생식물인 제주고사리삼, 개가시나무, 으름난초, 순채, 제주 물부추 등이 자생하며, 직박구리, 섬휘파람새 같은 제주텃새부터 긴꼬리딱새, 팔색조 같은 희귀 철새들까지 다양한 생명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덩굴에 휘감긴 채 제멋대로 가지를 뻗어낸 나무들 주변에는 양치식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바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콩짜개덩굴과 덥수룩한 이끼, 오래전 떨어진 낙엽들이 어수선하게 뒤엉켜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온전한 자연스러움으로 다가온다.
길 너비가 좁은 것도 숲의 원형을 보전하기 위한 배려다.
새들의 지저귐에 이따금 대답을 건네며 걷다 보면 곶자왈 전망대에 도착한다. 15m 높이의 전망대에 오르니 절반은 푸른 하늘, 절반은 초록 숲이 맞닿은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게 하는 풍경이다. 군산오름, 월라봉, 산방산, 바굼지오름, 모슬봉, 가시오름 등 곶자왈과 맞닿은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인공물이 배제된 '순수 자연'을 감상하는 이 시간은, 도심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는 풍경이기에 오래 머물러도 전혀 아깝지 않다.
작은 포구의 장엄한 일몰
제주곶자왈도립공원에서 차로 20여 분 거리의 제주 서쪽 해안에는 자그마한 자구내포구가 있다. 한치와 오징어로 유명하며, 제주에서 가장 큰 무인도인 차귀도로 향하는 배편이 있는 작은 항구다. 특히 수평선 너머로 지는 노을이 아름다워 일몰 명소로 손꼽히며, 사진 작가들도 자주 찾는다고 한다.
포구 옆 길가, 해풍을 맞으며 나란히 매달려 있는 오징어들 너머로 금빛 바다가 잔잔히 일렁인다. 그 위를 바삐 지나가는 어선은 자연에 기대어 치열하게 살아가는 어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듯하다. 포구 가까이에는 수월봉이라는 오름이 있다. 해발 77m의 수월봉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오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바닷속에서 화산이 폭발하며 생겨난 수월봉의 단면에는 파도에 의한 침식으로 뚜렷한 층리가 형성돼 있다. 폭발 당시 날아와 박힌 크고 작은 암석들은 저마다의 무늬를 새겨 놓았다. 절벽을 따라 난 탐방로를 걸어 다시 포구로 돌아왔을 때, 일몰은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금빛이던 하늘은 붉게 물들고, 차귀도의 윤곽은 점점 또렷해졌다. 사람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바삐 셔터를 눌렀다.
매일 반복되는 바다의 일몰이지만, 그 모습은 언제 봐도 장엄하다. 나를 압도하는 순수한 자연의 힘에,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것은, 나 역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일 것이다.